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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의 성장, 사화, 서원과 향약

powerup125 2020. 9. 24.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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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정리 > 사림의 정치적 성장과 훈구 세력

 

사림의 등장

김종직과 그 문인들이 성종 때 중용되면서 사림이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

이조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하였다.

 

구분

훈구파(관학파)

사림파

학통

조선을 개창한 정도전, 조준, 윤소종 계열

(혁명파 사대부 계열)

역성혁명을 거부한 정몽주, 길재 계열

(온건파 사대부 계열)

출신지역

주로 기호 지방(경기도, 충청도) 출생

영남 일대에서 세력 형성, 이후 기호 지방까지 확대

학풍

사장을 중시하면서 현실의 정치, 경제에 관심

(경세적 기능 중시), 실용적 유학

경학 중시, 유교의 기본적인 정치 철학 추구

(관념적인 이기론 중심, 이론적 유학)

사상

성리학만을 내세우지 않고 불교 등 타 사상에 관대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

정치

부국강병, 중앙 집권, 민생 안정 추구

왕도정치, 향촌 자치 추구

경제

대지주, 상공업 독점, 방납으로 경제적 이익을 취함

중소지주로 농민에게 영향력 행사

사관

자주적 사관(단군 숭배)

존화주의(기자 숭배)

업적

성균관, 집현전 통해 양성,

15세기 근세 문화 창조(관학파)

사학을 통해 양성,

16세기 이후 사상계 주도(사학파)

기타

한문학, 과학 기술 발달

한문학, 과학 기술 쇠퇴

 

 

사화의 발생 (사화: 사림파들이 화를 당한 것)

무오사화 (연산군 4, 1498)

세조를 비방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사초에 기록한 것을 트집 잡아 이극돈, 유자광 등의 훈구파가 연산군을 충동하여 김일손 등의 사림파를 제거하였다.

갑자사화 (연산군 10, 1504)

연산군의 생모인 윤 씨 폐출 및 사사 사건에 연루된 훈구파와 사림파가 제거됨

기묘사화 (중종 14, 1519)

조광조의 급격한 개혁과 위훈 삭제 사건을 계기

을사사화 (명종 원년, 1545)

외척끼리 권련다툼에 휩쓸려 사림 세력은 또 다시 정계에서 밀려났다.

명종의 외척(소윤파)인 윤원형이 선왕인 인종의 외척(대윤파) 윤임 일파를 제거

 

조광조의 개혁정치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으로 현량과를 통해 사람이 대서 등용되었다.

사림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 급진적 개혁을 추진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 삭제, 소격서(도교 의식을 주관하던 기구)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Q) 사림이 사화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A) 서원과 향약

서원

이황의 건의로 주세붕의 백운동 서원(최초,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을 제사)이 소수 서원으로 사액되었다.

기능 : 후진 교육(서재), 선현 제사(사묘), 사림들의 학문 토론 장소

->학문의 발달과 사림의 사회적 위상을 강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향약 : 향규와 계에 삼강오륜의 유교 윤리를 가미한 향촌의 자치 규약이다.

조광조가 <여씨향약>을 전국적으로 보급하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

이황의 이이의 노력을 널리 보급

<4대 덕목>

덕업상권 : 좋은 일은 서로 권한다.

예속상교 : 예의로 서로 사귄다.

과실상규 : 잘못은 서로 규제한다.

환난상휼 : 어려운 일은 서로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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